삶의 길/깨어있는 삶

내가 번뇌와 마주했던 수행법

눈꽃세상1 2010. 7. 29. 10:59

내가 번뇌와 마주했던 수행법 

 

<사라진 에고>

 

1999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내가 '평생에 소원하던 것을 모두 얻었다'는 기분이던 해. 누군가의 소개로 대성스님이 번역[진아여여]를 몇 페이지 넘기는 순간, 나는 흥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깨달음이 무엇이라고 구체적으로 직접 언급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가 언급한 깨달음은 이런 것이었다.

 

'존재, 의식, 지복의 상태'

 

난 멈추지 못하고 그 책을 끝까지 읽어 버렸다. 감동이 일었다.

 

'바로 이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압도 되었다.

 

깨달음은 말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말하는 순간에 그것은 이미 깨달음에서 벗어나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런데 '깨달음이 이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감히도...

 

그동안 내가 읽었던 스승들은 한결같이 결과를 미지수로 남겨두었다. 깨달음이 무엇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해버리면 그때부터 어떤 스승이라도 바로 에고의 화신으로 떨어지는 것인 줄 알았다(자기가 깨달았다고는 말해도, 그 깨달음이 무엇이라고 구체적으론 절대 설명하지 않는다).

 

나는 그 점에 늘 궁금함이 있었다. 언어에는 분명 표현의 한계가 있다. 어떤 사물 또는 어떤 상태를 설명할 때 실체 없이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진실로 전달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도가도 비상도....'

 

이런 식의 전달은 너무도 무책임한 전달이라는 생각을 했었다(이 점이 역설적으로 도덕경의 생명이긴 하다. 성경은 수없이 오류가 지적되지만 도덕경은 한자도 지적 당한 게 없다).

 

어쨌든 깨달음에 대한 어떤 스승들의 이야기도 모두 이런 식이었다. 혹여 깨달음의 실체가 한치라도 잘못 전달될까 우려하는 마음에서, 또는 그것이 말해졌을 때 틀에 잡힌 결과를 그리게 될 것이라는 우려에서 그랬을 것이라는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렇더라도 뜬구름 잡는 식의 설명이 아니라 경험했던 자신의 세밀한 체험을 곁들이면서 어느 정도 근접한 서술은 가능할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마하리쉬는 정말로 친절하게 깨달음이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음이 환상이 아니라 체험이라고 분명히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하리쉬가 말한 '존재, 의식, 지복'은 평소 생각하던 내 아이디어와 어느 정도 근접해 있었다.

 

나는 내 평생에 원하던 최고의 것을 얻었다는 기분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가 궁금해지며 은은히 가슴에 답답한 느낌이 잡혔다.

 

나는 다시 '나는 누구인가?'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가끔 '이 무엇고?'와 '나는 누구인가?'의 차이가 궁금해졌다. 대성스님은 역자 발문(跋文)에서 이것의 차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하였다.

 

"간화선의 화두 중에서는 '이뭣고?'(是什 ) 화두가 자기탐구의 '나는 누구인가?'와 유사한데, 이 화두법도 스리 라마나(마하리쉬)의 자기탐구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첫째, '이뭣고?' 화두에서는 그 공안의 언구(言句) 구성을 어떻게 하건 간에, 참구의 대상인 '이것'(是)이나 '한물건'(一物)은 나의 참된 성품 또는 본래면목을 가리키지만, '나는 누구인가?'에서의 '나'란 에고를 지칭한다. 둘째, 자기탐구에서는 '나'라는 느낌 자체를 주시하여 이 느낌을 주관적으로 확립하는 것이 주안점이며 '나는 누구인가?'하는 의심은 이를 돕는 하나의 유력한 수단으로 이해된다. '나'라는 것의 정체를 의심하는 끊임없는 탐구와 자기주시를 통해 '나'-느낌을 객관 대상으로부터 고립시키기만 하면 그것은 존립의 기반을 잃고 사라지므로, 자기탐구자는 일상 속에서 '나'라는 느낌 그 자체로서(즉, '깨어있는 나'로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이 탐구의 요체(要諦)인 것이다. 반면에 '이뭣고?' 화두에서는 여느 화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이것'에 대한 의정(疑情, 의심의 느낌)을 의단(疑團, 의심 덩어리)으로 발전시키고 이 의단을 타파함으로써 견성(見性)하는 것이다."

 

'궁금해하는 것'과 '바라보기'를 동시에 해왔던 나에게 이 '나는 누구인가?'는 양쪽의 특징을 두루 갖춘 이상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누구인가?'는 궁금해하며, 그 궁금해하는 나의 가슴의 느낌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환상적이었다. '나는 누구인가?'는 위파사나에 속하는 수련법이지만 기실 거기엔 화두의 요소도 있었던 것이다.

 

화두선(간화선)은 위파사나에서 궁금함의 요소, 에센스만을 집중적으로 뽑아 낸 독톡한 수련법이란 게 지금의 나의 생각이다.

 

2년 정도 후였다. 나는 이제까지와 의 체험과는 완연히 다른 상태에 돌입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습관처럼 '나는 누구인가?' 바라보는 데 궁금함이 잡히지가 않았다. 가슴에 답답한 느낌도 없었다.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되었다. 전 날 까지만 해도 늦은 밤 기차여행에서 맥주한잔을 하며 '나는 누구인가?'를 간절히 궁금해했던 것이다.

 

'어? 이거 왜 잘 되지가 않지?'

 

아무리 '나는 누구인가?' 자신을 바라보아도 궁금함이 잡히지가 않고 가슴의 답답한 느낌도 텅 비어 있었다.

 

약간 좀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내가 지극히 평범해져 버렸다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동안 공부가 잘 되어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이런 데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아주 평범해져 버린 것이다.

 

'남들처럼 똑 같아져 버렸네?'

 

약간 걱정되는 마음도 일었다.

 

'내 공부가 이제는 여기서 한계에 부닥친 거 아냐? 더 이상 아무리 해도 되지가 않지?.'

 

아마 전생이 있다면 내가 여기까지 공부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그 동안은 참 편하게 해 왔는데...'

 

그러고 보니 그 동안 나는 어쩔 수 없이 무언가에 쫓기 듯, 떠밀리 듯 공부를 해 온 것 같은 데, 이제부터는 내 스스로 공부를 해야하나 보다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 아무리 바라보아도 느낌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순간, 주변이 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환하게 밝아져 있었고, 의식이 성성이 살아(깨어)있었다. 온통 투명하다고나 할까? 아니면 맑다고 할까? 그리고 그 상태는 꺼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 때야 내가 뭔가 좀 다르다는 걸 알았다.

 

아침을 먹고 의자에 앉아 있는데 이 의식이 다시 드러난 채로 계속 사라지지가 않아 그냥 멍하니 앉아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이 온통 의식이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건 '존재감'이었다. 전에는 '나는 누구인가?'하며 바라보아야 잠시 드러났다가 언제 사라지는지 모르게 몇 초 후에 꺼져버렸던 의식인데 이제는 그냥 드러난 채로 사라지지 않고 한동안 계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라는 느낌이 없었다. 몸 안에도 밖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안이나 밖이나 어디에나 꽉 차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그 때 알았다. 내가 이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언젠가 술이 잔뜩 취한 상태에서 이 삶에서의 나의 소원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적이 있었다. 나는 아무런 소원이 없었다. 오로지 간절한 소망 하나 '나는 누구인가?'의 답을 얻는 것뿐이었다. 천하를 얻는 다 해도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또 그런 사람도 부럽지 않았다. 그도 역시 '나는 누구인가?'의 궁금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나와 똑같은 부자유한 사람이지 않겠는가.

 

나에게 전지전능한 능력이 있다면 난 그걸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데 사용할 것이다. 만약 그걸 알 수 없는 능력이라면 그런 건 무슨 능력이라도 나에겐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전지전능한 능력과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것 중 택일하라면 당연히 그건 후자였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의 해답을 얻는 것,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알고 있었다.

 

나는 그때 비로소 알았다. 이제는 내가 깨달음의 소망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나는 누구인가?'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오르지 '존재'할 뿐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면 은은히 잡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궁금함이 사라지자, 다시 말하면 그토록 갈망하던 깨달음의 갈증이 사라지고 나자, 내 마음에는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평화가 깃들었다.

 

평화 그 차제였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존재감'과 더불어 함께 있는 것, 그것이 나의 마지막 목적이었고, 이제 그 소원이 이루어 진 지금 모든 걸 다 이루었다는 느낌이었다. 그 '존재감'은 분명히 내 안에 깃들어 있는, 우리 모두의, 모든 존재의, 그리고 우주 전체에 가득 찬, 누구로부터도 창조된 적이 없는 또 사라지지도 않는, 내가 그토록 찾고 있었던 절대의 진리이자, 바로 '스스로 존재'하는, 내 자신의 진아(眞我)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이런 확신을 하게 된 것은 그때 처음부터 바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는 처음 몇 일 간 나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하여 상당히 신기해하였다.

 

그 즈음 저녁에 산책을 하면서 이 의식이 성성하게 살아있는 것(바라보기가 스스로 되는 것)을 신기해하던 중 또 다시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바라보는 자'가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바라보는 자는 이 드러난 의식상태(존재)에서도 다시 미세한 궁금함을 일으켰다.

 

'이 성성하게 드러난 의식(나는 그 때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그냥 존재 자체로 느끼게 되었다)을 바라보고 있는 이것은 무엇이지?'

 

그 바라보고 있는 또 하나의 의식도 너무나 또렷이 의식되었다. 주변에 환하게 드러나 있는 의식, 그리고 그것을(주변이 드러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이 바라보는 자, 이 바라보는 의식은 무엇이란 말인가?

 

한동안 이 두 가지 의식이 동시에 성성하게 잡힐 때 나는 생각하였다.

 

'근원적인 존재는 드러났지만 이 궁금해하는 자는 여전히 남아있잖아?'

 

그러다가 우연히바라보는 자(바라보고 있는 의식)를 드러난 의식에다 맞추어 보았다. 그러자,

 

"바라보는 자는 사라지고 드러난 의식만 남았다. 그것은 존재감을 벗어버린 '존재 자체'였다."

 

"오로지 존재 뿐 이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그 동안 나를 주시하고 있었던 그 '바라보는 자'가 에고의 마지막 실체였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자를 의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스스로 규정한 관념으로 평생을 산다. 그리고 바라보는 자를 의식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자신의 실체를 찾는 여정이 계속된다. 그리고 그 자신을 바라보는 자를 어떻게 처리할 줄 몰라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고(苦, 또는 수행) 속에 보내게된다.

 

바라보는 자가 남아있는 한 아무리 수행이 깊더라도 미세한 궁금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그것은 미세한 고(부자유)로 남아있게 된다는 것이 지금 나의 생각이다. 마지막 그 바라보는 자가 사라졌을 때, 비로소 무엇에도 걸림 없는 자유가, 해방감이 밀려온다. 그것은 평화 자체로 느껴진다. 걸림 없는, 그리고 이유 없이 밀려오는 이 평화, 이것이 느껴지는 상태가 바로 진정한 자유, 진정한 해방이 아닐까.

 

나는 그동안 주목할 만한 체험이 닥쳐왔을 때 성장했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성장이 멈추어버렸다. 영혼의 성장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다. 애초부터 우리의 영혼은 전체가 하나인 채로 그렇게 완전하게 '스스로 존재'하고 있었을 뿐이다.

 

영혼의 개체성? 나는 의심스럽다. 오히려 우주는 전체적으로 끝이 없는(누구는 끝이 있다고도 하지만) 무한한 하나(개체를 포함한)의 영혼(존재)이라고 하는 게 나에겐 더 자연스럽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바라보는 자'를 의식할 수 없다. 억지로 의식하려고 노력해보면 상당한 에너지가 들어가므로 힘만 들 뿐이며,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가 없다.러면서도 의식은 몰록 몰록 드러나 성성하게 꺼지지 않고 드러나 있다. 평상시 마음이 바로 드러난 의식상태로 있게 되는 것이다.

 

※ 출처 : 이 글은 故장휘용교수님 사이트 (지금은 폐쇄)에서 스크랩해 둔 글입니다.